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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o Column] 하늘 아래 가장 콧대 높은 운송수단, 프레스티지 자동차

 하늘 아래 가장 콧대 높은 운송수단
프레스티지 자동차

 

수입자동차협회의 집계에 따르면 벤틀리는 지난해 60대 팔렸고 2009년엔 55대가 판매됐다. 한국에 막 상륙했던 2007~2008년에도 인기가 높았다. 각각 40대, 47대씩 팔려나갔다. 최소 2억 8,000만 원인 고가의 자동차로서 대단한 성공이었다. 이를 두고 자동차업계 사람들은“세상이 변하긴 변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도 이제 고급 차를 넘어선 프레스티지 자동차에 관심을 갖는 부자들이 즐비한 시장이 된 것이다.

김형준/월간 <모터트렌드> 에디터


2000년대 초까지 프레스티지 리무진이라면 메르세데스 벤츠 S 클래스와 BMW7시리즈가 전부였다. 이들을 추격하느라 바빴던 아우디 A8까지 포함해도 독일 프리미엄 브랜드 3사 제품이 고작이었다. S 클래스와 7시리즈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절대강자는 S 클래스였다. 1954년 W180 시리즈가 등장한 이래 8번의 변화를 거쳤지만 S 클래스가 이 시장의 정상에서 내려온 적은 몇 번 되지 않는다. 보닛 끝에 달린‘세 꼭지점 별’엠블럼은 전 세계 어디서나 통용되는‘최고급 세단’의 보증수표와 같았다.

프레스티지 세단 세상이 변한 건 2003년부터였다. 이 무렵 롤스로이스 팬텀, 벤틀리 컨티넨탈, 마이바흐가 약속한 것처럼 출시됐다. 모두 이전까지 세상에 없던 차가 아니었지만 세상에 없던 차인 것처럼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S클래스가 하늘 아래 가장 유명한 프레스티지 리무진이라면 롤스로이스 팬텀은 하늘 아래 가장 위엄 있는 프레스티지 리무진이었다. 오랜 시간 영국 왕실의‘가마’역할을 했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공식 의전차로도 명망이 높았다. 명망만 높은 게 아니라 가격도 높았다. 철저하게 주문생산 방식을 따른 팬텀 가격은 S 클래스의 두세 배를 웃돌았다. 한때 롤스로이스는 운전수 교육도 병행했다. 교육 내용엔 롤스로이스를 롤스로이스답게 운전하는 요령뿐 아니라 오너를 모시는 예절도 포함돼 있었다. 벤틀리는 1931년 롤스로이스에 인수된 이래 롤스로이스 자동차의 스포츠 버전으로 시장에 어필했다. 말이 좋아 스포티한 롤스로이스지 실상은 엠블럼만 다른 롤스로이스에 다름 아니었다. 게다가 값어치가 떨어지는 차도 아니었다. 숙련된 장인의 손끝을 거치는 핸드메이드와 주문생산 방식 등은 롤스로이스와 다르지 않았다.

롤스로이스와 벤틀리의 불안한 동거는 1998년 파경에 이르렀다. 경영난에 허덕이던 롤스로이스 자동차 그룹이 결국 시장에 매물로 나왔고, 프리미엄 이상의 이미지가 필요했던 독일 BMW와 폭스바겐이 인수자로 나섰다. 세기의 인수합병 전쟁으로 불린 두 회사의 다툼은 결국 BMW가 롤스로이스의 브랜드 사용권한을, 폭스바겐은 영국 크루 공장과 벤틀리 등 롤스로이스 브랜드를 제외한 롤스로이스 자동차 그룹의 모든 걸 소유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2003년 선보인 롤스로이스와 벤틀리는 완전히 새로운 자동차였다. BMW는 7시리즈 기술을 응용해 롤스로이스 팬텀을 제작했고, 폭스바겐은 페이톤 플랫폼으로 벤틀리 컨티넨탈 시리즈를 완성했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지만 마이바흐는 앞선 두 브랜드와 조금 다른 경우였다. 롤스로이스와 벤틀리가 로열 패밀리의 자동차라는 살아 있는 역사로 각광받는다면, 독일의 마이바흐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죽은 역사’를 끄집어내 새로운 가치로 승화시킨 케이스다. 마이바흐는 1920~40년대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자동차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2차 대전 때 군수공장으로 전환됐고 이때부터 자동차 생산은 완전히 중단됐다. 이후 마이바흐는 메르세데스 벤츠에 인수됐지만 브랜드가 되살아난건 50여 년도 더 지난 후의 일. 롤스로이스와 벤틀리가 그랬던 것처럼 마이바흐도모기업에서 가장 값비싼 자동차 기술을 활용했다. 새로운 마이바흐 57과 62는 벤츠 S 클래스의 초호화 리무진 버전이라 해도 좋았다. 새로운 자동차 개발엔 최소수백억 원이 필요하다.

제품뿐 아니라 브랜드까지 완전히 새로 소개하는 경우라면 수조 원이 우습다. 게다가 롤스로이스 팬텀과 마이바흐 57/62는 대당 가격이 7억~10억 원에 이르는 초고가 자동차로 자리매김했다. 가격, 생산방식 등을 감안하면 한해 1,000대 판매가 아슬아슬했다. 이들 자동차는 애초부터 대량판매가 불가능한, 아니 애초부터 소량판매를 예상하고 내놓은‘하늘 아래 가장 콧대 높은 운송수단’이었다. 벤틀리 컨티넨탈은 달랐다. 수제작, 주문생산 등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석 대 가운데 대량생산 체계가 가장 적극적으로 도입된 자동차였다. 한해 수천대 생산이 가능했다. 가격도 3억~5억 원으로 상대적으로 저렴했다.

2000년대 초는‘새로운 부자’들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미국과 유럽과 중동 등 기존 부자들 외에 러시아와 중국 등에서 신흥 부자들이 속출했다. 독일 자동차 3사가 천문학적인 비용을 써가며 껍데기만 남아 있던 초호화 자동차를 되살린 건 점 차 커져가는‘부자 시장’을 일찌감치 내다본 결과였다. 예상했던 대로 부자 시장은 폭발했다. 석 대의 초호화 자동차는 중국과 러시아 등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2003년 300대였던 롤스로이스 팬텀 판매량은 이듬해 792대로 껑충 뛰었다.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실상은 롤스로이스가 1년 동안 만들 수 있는 최대치였다. 한해 1,000대 팔기가 어렵던 벤틀리 판매량은 컨티넨탈 출시 후 6,000대 수준으로 수직 상승했다. 2007년엔 1만 대 판매를 돌파했다. 반면 마이바흐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당초 연간 1,000대 판매를 예상했지만 목표에 불과했다. 지금은 1년에 200대 남짓에 불과하다.

벤틀리는‘프레스티지 리무진’의 새로운 조류를 만들었다. 컨티넨탈 세단은 벤츠S 클래스 최상위 모델인 S 600과 롤스로이스 팬텀 사이에 위치한다. 일종의 틈새 모델이다. 자격도 충분했다. 초호화 리무진의 상징과 같은 12기통 엔진을 얹었고주문생산과 수제작 방식도 겸비했다. S 600보다 조금 비싸고 팬텀보다 한참 저렴한 가격도 절묘했다. 이제 S 클래스는 지겹다는 기존 부자들에게도, 어딘가 남다른 제품을 찾는 새로운 부자들에게도 벤틀리 세단은 매력적인 상품이었다. ‘고성능’은 럭셔리 자동차에서 빠져선 안 될 항목. 벤틀리는 발 빠르게 고성능 버전도 추가했다. 엔진 출력을 610마력까지 키운‘컨티넨탈 플라잉 스퍼 스피드’는 최고시속322km를 달렸고 4.8초 안에 시속 100km 가속을 마무리하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4도어 세단이었다. 스피드 버전 벤틀리 세단은 지난해 국내에서 25대 팔렸다. 같은 기간 벤츠 S 63 AMG는 37대 팔렸다.

롤스로이스 팬텀은 또 다른 차원의 프레스티지 세단이다. 생김새부터 풍기는 분위기까지가 권위적이고 압도적이며 한편으론 존경심을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판매량은 많지 않다. 지난해 국내에서 딱 한 대 팔렸다. 롱 휠베이스 모델(팬텀 EWB)까지 포함하면 석 대였다. 2009년엔 전부 한 대였고 2008년엔 여섯 대였다. 초라한성적이아니다.‘ 부자시장’피라미드의꼭지점에있는자동차다운판매량이다.소량생산 자동차란 점도 무시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부자의 마음이다. 몇 년 전 팬텀 국내 출시 행사에서 만난 롤스로이스 영업사원은 이렇게 말했다.

 


“고객들 사이에서 팬텀은 아무나 사는 자동차가 아니란 인식이 있습니다. 나도 부자지만 이 차를 탈 만큼 부자는 아니다, 라는 자기검열이랄까요? 단순히 돈이 얼마 있고의 문제만도 아닙니다. 사회적 지위나 명성까지 뒷받침돼야 떳떳하게 탈 수 있다는 거죠.”